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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ㅊ ) 성씨(姓氏) 모음

초계최씨(草溪崔氏) 가문의 유래 돌림자 족보

by 하얀나비 미드저니 2023. 2. 4.

관향(貫鄕)의 유래(由來)

초계(草溪)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초팔혜현(草八兮懸)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 : 합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때는 초계(草溪)로 하였고 1018년(현종 9) 합주(陜州)에 속했다. 명종(明종) 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6년(충숙왕 3)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913년 합천군(陜川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합천군에 속한 초계면(草溪面)으로 남아있다.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초계 최씨(草溪崔氏)는 전주 최씨(全州崔氏)에서 분파(分派)되었고 문헌에 의하면 시조(始祖) 최용궁(崔龍宮)은 전주최씨 일파의 시조 최균(崔均)의 4세손으로, 1296년(충렬왕 22)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충익대보조공신(忠翼戴保祚功臣)으로 판사(判事)와 참찬(參贊)을 거쳐 광록대부(光錄大夫)로 세자태부(世子太傅)에 이르렀으며,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초계(草溪)로 하여 문호를 열었으나, 상계(上溪)의 기록이 실전되어 그의 13세손 신재(新齎) 산두(山斗)를 중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산두(山斗)는 참봉(參奉)을 지낸 한영(漢榮)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용모와 기개(氣槪)가 뛰어났고 학문을 좋아하여 9세대 때 까마귀가 그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봉양함을 보고 그 효성(孝誠)에 감동하여 영오시(詠烏詩)를 지었다.

 

초계최씨-뿌리공원내-조형물-전면
뿌리공원내 초계최씨 조형물 전면

 

1513년(중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수찬(修撰)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사간원 헌납 지평(持平)을 거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올랐고, 문장에 뛰어나 윤구(尹衢) 류성춘(柳成春)과 함께 호남(湖南)으 3절로 알려졌다. 산두(山斗)는 슬하에 교적에 오른 병길(丙吉)과 장령을 지낸 정길(丁吉) 형제가 있었으며, 후세에서는 규록(圭祿)의 아들 경모(璟艒)가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白衣從軍)한 이지(易支)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후예 수문장(守門將)이 되어 명망높은 가문을 빛냈다.

 

이렇게 명문(名門)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초계(草溪) 최씨는 전국일가찾기운동을 전개하여 1971년 7월 20일 광주(光州)에서 대종회총회(大宗會總會)를 개최하였고, 28세손 동련(棟連), 병오(炳吾)가 대표하여 전국을 순방하며 성의(誠意)에 찬 종친(宗親)들의 힘을 얻어 1976년 6월 25일 초계최씨 대종회 지역대의원 총회를 열고 초계최씨 대동보 편찬사업을 결의(決議)한 후 이를 강력히 추진하여 대동보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성했으며, 또한 고종 때 훼철(毁撤) 되었던 도원서원(道源書院)을 후손들이 중건(重建), 1977년 6월 29일에 위패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족보는 한국 문화에서 가족의 혈통과 역사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것은 한국 유산의 측면이며 일반적으로 정보는 세대를 거쳐 전승됩니다. 족보라고 불리는 가족 계보 책은 가계를 기록하는데  사용되며 출생, 사망, 결혼 및 기타 가족 역사의 종요한 사건과 같은 정보를 포함합니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가계는 부계를 통해 이어졌고, 장남은 가계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오늘날 족보는 특히 가족 상봉과 조상 숭배 의식의 형태로 한국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초계최씨-돌림자-항렬표
초계최씨 돌림자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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