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貫鄕)의 연혁(沿革)
여산(礪山)은 전라북도(全羅北道) 익산(益山)에 속해있는 속해있는 지명으로 여량(礪良)과 낭산(朗山) 두 현(縣)의 합명인데, 여량현(礪良縣 : 일명 礪陽)은 본래 백제(百濟)의 지량초현(只良肖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여량으로 고쳤다. 낭산현(朗山縣)은 본래 백제의 알지산현(閼地山縣)인데 경덕왕이 야산(野山)으로 고치고 고려 때 낭산으로 하였으며, 1401년(정종 3) 두 현을 합하여 여산현(礪山縣)으로 칭하고 세종(世宗) 때 군(郡)으로 승격, 1699년(숙종 25) 부(府)가 되었다가 1895년 다시 여산군이 되고, 1913년 익산군(益山郡)에 병합되어 그 일부지역은 여산면(礪山面)으로 남아있다.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 때 진사(進士)로 나라에 훈공울 세워 여산군에 봉해졌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문헌에 의하여 그의 선계(先系)는 중국 경조(京兆)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株殷)의 후손 자영(自英)이다. 그는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유익(惟翊) 여산송씨(礪山宋氏)" "둘째 천익(天翊) 은진송씨(恩津宋氏)" "막내 문익(文翊) 서산송씨(瑞山宋氏)" 의 시조가 되어 우리나라의 모든 송씨의 연원(淵源)을 이룬 것 으로 전해진다.
은진, 진천송씨와 함께 우리나라 송씨의 가장 화려한 인맥을 이룬 여산송씨는 시조의 다들 숙문(淑文)이 고려 원종(元宗)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했고, 증손(曾孫) 송례(宋禮)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원나라 도원수(道元師) 홀돈(忽敦), 부원수(副元師) 다구(茶邱)와 함께 일본정벌에 참전한 후 충렬왕때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問下侍中)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에 올라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져서 명문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손자대에 와서
운( 惲 : 개성원윤을 지냄 )을 파조로 하는 원윤공파(元尹公派)
방영 ( 邦英 : 밀직부사를 역임 )을 파조로 하는 밀직공파(密直公派)
원미 (元美 : 소윤을 지냄 )를 파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
인 ( 璘 : 지신사를 지냄 )을 파조로 하는 시신공파(知申公派)
서( 瑞 : 정가공을 지냄 )를 파조로 하는 정가공파(正嘉公派)
등 크게 다섯 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개성원윤(開城元尹) 운(惲)의 6세손 간(侃)이 세종(世宗)과 단종대(端宗代)에 걸쳐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고, 왕명으로 호남을 순무(巡撫)하고 돌아와 계유정난(癸酉靖亂)으로 단종이 영월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고향인 여산을 눌러 앉아 두문불출(杜門不出) 하였다. 단종이 시해되자 산 속으로 들어가 통곡하여, 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曺尙治), 조여(趙旅) 정지산(鄭之産) 이성희(李成憘) 이축(李蓄) 엄흥도(嚴興道)와 더불어 복상한 팔절(八節)
로 숭상받았다.
흥양(興陽)의 마륜촌(馬輪村) 산정에 숨어서 술이나 먹고 산에 올라가 실컷 통곡하는 미치광이 짓으로 여생을 마쳐 동학사(東鶴寺)의 초혼각(招魂閣)과 운곡서원(雲谷書院) 숙모전(肅募殿) 세충사(世忠寺)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6세손 건(建 : 현령 하형의 아들)은 임진왜란 때 조방장(組防將) 양사준(梁士俊)의 선봉으로 나가 공을 세우고 성주판관(星州判官)이 되었으며, 뒤에 함창(咸昌)의 싸움에서 화살을 다 쏘고 북배한 다음 장렬하게 순절했다.
도첨의 좌찬성(都僉議左贊成) 원미(元美)의 현손으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역임한 극창(克昌)의 아들 천희(千喜)는 성종 때 형조참판(刑曹參判)과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내고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함양(咸陽)에서 미신으로 백성을 현혹시킨 무당을 장살(杖殺)하여 기강을 세웠으며 뒤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군수(郡守) 연손(演孫 : 지신사 인의 6세손)의 아들로 연산군 때 알성(謁聖) 급제한 세림(世林)은 중종 때 능성현령(陵城縣令)으로 재직중 이도쇄신(吏道刷新)과 지방행정의 개혁을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했으며, 문장과 그림 글씨에 모두 뛰어났고 어면순(御眠楯)을 저술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의 아우 세형(世珩)도 학행(學行)이 뛰어났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위사삼등공신(衛社三等功臣)으로 대사헌(大司憲)과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요승 보우(普雨)의 처벌을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형의 손자 여종(汝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안 군수(樂安郡守) 신호(申浩)의 막료로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종군하여 한산도 싸움에서 무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終功臣)으로 경상좌도 수군우후(慶尙左道水軍虞候)를 지냈다.
지신사(知申事) 인(璘)의 6세손 현수(玹壽 : 지중추부사 복원의 아들)는 딸이 단종비(端宗妃 : 정순왕후)로 책봉되자 지돈령부사(知敦零府事)에 올라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졌으며, 옛 친구인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자 판돈령부사(判敦零府事)가 되었다. 이어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었으나 세조의 두둔으로 무사했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사사(賜死)된후 (鄭昌孫)을 비롯한 양사의 주장으로 마침내 주살되었다.
여산송씨(礪山宋氏) 돌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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