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貫鄕)의 연혁(沿革)
고령(高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남서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옛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중심지인데 16대 520년간을 계승해 오다가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때 신라에 병합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고양군(高陽郡)이 되었고 1018년(고려 현종 9) 영천현(靈川縣)이 되어 경산부(京山府 : 지금의 성주)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고양군의 고(高)와 영천현의 (靈)을 따서 고령현(高靈縣)이라 하였으며 1895년(고종 32)에 성주(星州) 9면과 현풍(玄風) 3면을 병합하여 고령군(高靈郡)이 되었다.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항렬표
고령박씨(高靈朴氏)는 신라왕족(新羅王族)의 후예(後裔)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 : 제54대 왕 재위기간 917~924)의 둘째 아들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을 시조(始祖)로 하고 후대로 내려와 어사공(御史公) 섬(暹), 부창정공(副創正公) 환(還), 주부공(主簿公) 연(蓮)을 각각 기일세(起一世)하여 관향(貫鄕)을 고령(高靈)으로 삼았다. 고려(高麗) 후기에서부터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명신현관(名臣賢官)을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반열(班列)에 올랐던 고령박씨는 비록 수는 많지 않지만 밀양(密陽), 반남(潘南)에 이어 세 번째로 손꼽힌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어사공(御史公) 섬(暹)의 8세손으로 조선 세조(世祖) 때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한 담손(聃孫)의 아들 은(誾)은 조선(朝鮮) 5백년의 으뜸가는 한시인(漢詩人)으로 일컬어졌으며 용모가 뛰어났고 벼슬은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연산군(燕山君) 때 그는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으면서 류자광(柳子光), 성준(成俊), 이극균(李克均)의 죄상을 연산군에게 극언했다가 그들의 모함으로 파직 당하자 산수(山水)를 주유하면서 문주(文酒)로 소일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하루는 홍문관(弘文館)에서 임금이 사냥하는 것을 삼가하라는 차자(箚子 : 간단한 서식으로 하는 상소문)가 올라왔다. 화가 난 연산군은 발의한 자를 잡아죽이려고 옥사를 일으켰으나 발의한 자가 나타나지 않자 평소 강개(慷慨)하여 바른말을 자 하는 은(誾 : 당시 홍문관 수찬으로 있었음)을 지목하여 본보기로 사형을 시키고 재산을 몰수해 버렸다. 그러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게 된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세 번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은(誾)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인량(寅亮)은 참판(參判)을 역임했고 둘째 공량(公亮)은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로 급제하여 명종(明宗) 때 황해도 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로 나갔다가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글씨에 능하여 많은 (금석문<金石文>)을 남겼고 종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한편 은(誾)의 증손(曾孫) 경업(慶業)은 광해군(光海君) 때 청주목사(淸州牧使)를 거쳐 대간(臺諫)에 재직 중 부정한 관리를 엄중히 탄핵하기로 유명하여 하루에 10여 명씩을 삭직(削職) 시켰다고 하며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앞서 그에 의해 삭직 당했던 공신들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있던 이기의 아들이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있으면서 악정(惡政)이 있었으나 배경에 눌려 아무도 말을 못했는데 그가 탄핵하여 파직시켰고 심지어는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있는 그의 아버지가 군내의 원망을 사자 아버지를 탄핵하여 파직시키기까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원한을 쌓아 온 것이 오래여서 벼슬이 통달하지 못하고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여 선치(善治)로 명성이 났는데도 매사에 비방을 받았다고 " 죽차한화(竹窓閒話)"에 기록되어 있다. 이조판서로 효행(孝行)이 뛰어났던 장원(長遠 : 은의 6세손)의 증손 문수(文秀)는 고령박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바른 말을 잘 했으며 흑백이 분명하여 불의와 철저히 배제하였다. 경종(京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영조조(英祖朝)에 암행어사(暗行御使)로 나가 숱한 일화를 남겼으며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민생(民生)을 구제하는 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특히 함경도(咸鏡道)에 홍수로 흉년이 들었을 때 과단성있는 결정으로 이를 구제하여 함흥 만세교 앞에 공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문수의 현손(玄孫) 영보(永輔)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으며, 고령박씨가 낳은 유일한 상신(相臣)인 영원(永元)은 예조참의(禮曹參議) 종순(鐘淳)의 아들로 영원은 1816년(순조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헌종(憲宗)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사은사(謝恩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철종(哲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부창정(副倉正) 환(還)의 후손에서는 고려조에서 공신(功臣)으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진 광순(光純 : 찬성사 수견의 아들), 광우(光佑) 형제가 유명했으며 특히 광순은 아들 우생(雨生 : 문하지중으로 찬화공신에 책록), 손자 임종(林宗 : 우왕 때 문하평리로 익대보조공신에 책록)과 함께 3대(代)가 공신(功臣)에 올라 가문을 크게 중흥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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