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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ㅈ ) 성씨(姓氏) 모음

동래정씨(東萊鄭氏) 가문의 유래 돌림자

by 하얀나비 미드저니 2023. 2. 4.

 

관향(貫鄕)의 연혁(沿革)

동래(東萊)는 부산직할시와 경남 양산시의 일부지역을 차지했던 지명(地名)으로 본래 장산국(萇山國 : 혹은 萊山國)인데 신라 때 점령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으로 고치고 경덕왕(景德王) 때 동래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 울주(蔚州 : 울산)에 편입시켰다가 1547년(명종 2) 부(府)로 승격시키고 1895년(고종 32) 관찰부(觀察府)를 설치, 1896년 부윤(府尹)으로 삼았으며, 1903년 군으로 고쳤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부산부에 예속되고 부산부에 속하지 않는 일부구역과 기장군(機張郡) 일원을 병합하여 동래군을 이루었다. 그 후 대부분이 부산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양산군에 편입됨으로써 동래군의 행정구역 명칭은 소멸되었는데 부산직할시에 편입된 대부분은 동래구에 속해 있다.

동래정씨-뿌리공원내-조형물-전면
뿌리공원 동래정씨 조형물 전면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신라(新羅)의 전신(前身)인 사로(斯盧)의 6부촌장(六部村長)으로 정씨(鄭氏)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았던 취산진지촌장(翠山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원손(遠孫) 정회문(鄭繪文 : 안일 호장)을 시조(始祖) 로 받들고 고려(高麗) 초에 보윤(甫尹)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며 누대(累代)에 걸쳐 정착 세거(世居)해 온 동래(東萊)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온화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하여 남과 적을 삼지 않는다는 가통(家統)을 지켜오면서 명문거족(名門巨族)으 지위를 굳혀온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부산 양정동 화지산(華池山)에 자리잡은 2세(世) 안일공(安逸公) 정문도(鄭文道) 묘소(墓所)에 대한 명당(明堂)에 대한 명당(明堂)의 전설이 아래와 같이 전해오고 있다.

 

그가 죽었을 때 맏아들 목(穆)이 장지(葬ㄹ地)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가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지내던 고익호(高益鎬)가 일러준 화지산에 장례를 치루었다. 그러나 장례를 치른 다음날 이 곳에 와 보니 누군가가 무덤을 파헤쳐 놓았다. 기이하게 생각하고 다시 복원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분통을 참을 수 없었던 목(穆)은 밤을 세워 가며 숨어 지켜보기로 하였다. 밤이 어지간히 깊었을 때  도깨비들이 나타나 또 다시 무덤을 파헤치며 하는 말이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건드려, 적어도 금관을 묻어야 할 곳에,,,, " 하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가난하게 살았던 목(穆)은 이 사실을 알고 걱정이 되어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 "염려마오, 황금빛 나는 보릿짚으로 관을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을 것 이오" 하고는 사라졌다.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과연 그 후 부터는 무사하였다. 목(穆)은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제(濟), 점(漸), 택(澤), 沆) 4형제를 두었으며 목(穆)의 아우 선조(先祚)는 호장(戶長)을 지냈고 그의 후손들이 동래(東萊)와 양산(梁山) 등지에서 산거(散居)하면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좌복야 목(穆)의 셋째 아들 택(澤)이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문장(文章)과 재능(才能)으로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항(抗)은 숙종(肅宗) 때 등과하여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陽廣道)와 충청도(忠淸道)의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한 후 인종(仁宗) 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예부상서(禮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다.

동래정씨-뿌리공원내-조형물-후면
뿌리공원 동래정씨 조형물 후면

인종비(仁宗妃) 공예대후(恭睿大后) 동생의 남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서(敍)는 의종(毅宗) 때 폐신(嬖臣)들의 참소로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정자(亭子)를 짓고 오이를 심어 과정(瓜亭)이라 당호(堂號)를 삼고 연군(戀君)의 정(情)을 가요(歌謠)로 읊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어 우리나라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빛나는 업적(業績)을 남겼다. 13세 때 진사(進士)가 되었던 흠지(欽之)는 양도공(良度公) 양생(良生)의 손자(孫子)로 풍채가 좋고 성품이 강직했으며, 특히 사학(史學)과 천문학(天文學)에 정통하여 세종(世宗)의 명을 받아 역법(曆法)을 연구했고 그의 아들 갑손(甲孫)과 창손(昌孫)이 크게 현달했다.

 

세종(世宗) 때 독격골(獨擊鶻)로 조정이 두려워하였던 갑손(甲孫)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잡아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와 예조 판서(禮曹判書), 좌,우참찬(左右參贊)을 지내고 중종(中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의하면 그의 성격이 청직(淸直)하고 엄준(嚴峻)하여 자제(子第)들도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청탁을 못했다고 한다. 일찌기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가 되었을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漢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榜)이 발표되었음을 보니 그의 아들 오(烏)가 방에 들었으므로 시관(試官)을 불러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오(烏)가 학업에 정진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 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시관을 파면시켰다고 한다.

동래정씨-돌림자-항렬표
동래정씨 돌림자 항렬표
동래정씨-돌림자-항렬표
동래정씨 돌림자 항렬표
동래정씨-돌림자-항렬표
동래정씨 돌림자 항렬표
동래정씨-돌림자-항렬표
뿌리공원 동래정씨 돌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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