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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ㅈ ) 성씨(姓氏) 모음

한양조씨(漢陽趙氏)

by 하얀나비 미드저니 2023. 2. 9.

관향(貫鄕)의 연혁(沿革)

한양(漢陽)은 현재 서울시(서울특별시)의 옛지명(地名)으로, 한양부(漢陽府)의 동쪽은 광주부(光州府), 서쪽은 양천현(陽川縣), 남쪽은 시흥현(始興縣), 북은 양주목(楊州牧)에 접하고 낙산, 인왕산, 남산, 한강, 백악산, 북한산으로 둘러싸인 조선시대의 왕도(王都)이다. 고구려 때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불리다가 백제 때 축성건도(築城建都)하여 신라 때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고 장한성(長漢城)을 쌓은 뒤 한주(漢州)로 고쳤다.

고려초에 양주(楊州), 충렬왕 때 한양(漢陽)이라 하다가 조선 태조 때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경기도 양주목(楊州牧)에 붙였다. 이로부터 중앙정부라 하여 한양(漢陽)으로만 호칭하다가 광무제(光武帝) 때 황성(皇城), 한성부(漢城府), 일제 때 경성부(京城府), 광복 후 서울로 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한양조씨(漢陽趙氏) 항렬 위치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시조(始祖) 조지수(趙之壽)는 덕원부 용진현(德源府龍津縣)에 세거(世居)해 온 사족의 후예로 고려초에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 후 수손들은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한성(漢城)으로 이거(移居)하여 가세(家勢)가 크게 번창(繁昌)하였고, 많은 명신(名臣)과 훈신(勳臣) 유현(유賢)을 배출(輩出)하였으므로 본관(本貫)을 한양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한양조씨는 지수(之壽)의 후손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인재(麟才)의 계통과 총관(摠官)을 지낸 휘(暉)으 계통으로 대별(大別)되어, 서로 계대(系代)를 다르게 하며 보첩(譜牒)도 따로 만들고 있다.

한양조씨-뿌리공원내-조형물-전면
뿌리공원 한양조씨 조형물 전면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휘(揮)으 아들 양기(良琪)가 1281년(충렬왕 7)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일본정벌(日本征伐)에 참가했고 21세 때 합단(哈丹)의 침입을 대파(大破)한 공(功)으로 원나라 세조(世祖)로부터 금포(錦抱)와 옥대(玉帶)를 하사(下賜)받았다; 양기(良琪)의 아들 돈(暾)은 1356년(공민왕 5) 쌍성수복(雙城收復) 작전 때 공(功)을 세워 예빈경(禮賓卿)이 되고, 이듬해 평양에 침입한 훙건적(紅巾賊)을 대파(大破)한 후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고 1375년(우왕 1)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돈(暾)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벼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 중 맏아들 인벽(仁璧)은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왜구(倭寇)를 토벌하였고 정화공주(貞和公主)와 결혼하여 이성계(李成桂)으 매부(妹夫)가 되었으며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판도판서(版圖判書) 인재(麟才)의 증손(曾孫)이자 판서(判書) 세진(世珍)의 아들인 영무(榮茂)는 조선조에 개국3등공신(開國3等功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으며 1405년(태종 5)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이듬해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 를 겸임한 후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진봉(進封)되어 태종(太宗)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조선조에 와서 한양조씨의 가문을 더욱 빛낸 사림파(士林派)의 영수 정암 광조(光祖)는 개국공신 온(溫)의 현손(玄孫)으로 14세 때 어천도찰방(漁川道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원강(元綱)을 따라가 희천(熙川)에 유배중인 한훤당 김광필(金宏弼)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힘썼으며, 유교(儒敎)로서 정치(政治)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해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역설했다. 중종(中宗) 때 대사헌(大司憲)에 있으면서 신진사류(新進士類)인 30대의 소장학자(少壯學者)들을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勳舊派)를 외직(外職)으로 몰아내는 등 과격한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훈구파으 반발을 야기시켜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주동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피화(被禍)되어 능주(陵州)에 유배(流配), 배소(配所)에서 죽음을 당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정암 조광조(趙光祖), 일두 정여창(鄭汝昌), 회재 이언적(李彦迪)을 가리켜 "동방사현"이라 칭송하여 평생토록 숭배하였다. 그 밖에 인물로는 중종(中宗) 때 대사간(大司諫), 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위한(緯韓)과 그의 동생으로 시문(詩文)에 능한 찬한(纘韓)이 유명했다. 공근(公謹)은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오르고 한흥군(漢興君)에 봉해졌으며, 인조(仁祖)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고,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경(卿)은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한양조씨-돌림자-항렬표
한양조씨 돌림자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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