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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ㅎ ) 성씨(姓氏) 모음

장수황씨(長水黃氏) 가문의 유래 돌림자

by 하얀나비 미드저니 2023. 2. 5.

관향(貫鄕)의 연혁(沿革)

장수(長水)는 전라북도(全羅北道)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우평(雨平)이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고택(高澤)이라 하여 장계군에 속하였다가 고려시대 이후 장수현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에 소속되었고 1950년(고종 32) 군(郡)이 되었다.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장수 황씨(長水黃氏)의 시조(始祖) 황경(黃璥)은 통일신라(統一新羅) 경순왕(敬順王)의 부마(駙馬)로 시중(侍中)을 지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우리나라 황씨(黃氏)의 도시조(都始祖) 황락(黃洛)의 후손이며 장수군(長水君)에 봉해진 을고(乙古)의 아들로 전한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을 참의(參議)를 지낸 황석부(黃石富)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조선(朝鮮)의 사대명상(四大名相)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황희(黃喜) 정승(政丞)을 들 수 있다.  그는 1363년(고려 공민왕 12) 개성(開城)에서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27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隱居)했으나 이태조(李太祖)의 간청으로 벼슬길에 올라 태종(太宗) 때에는 5조(五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거쳐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세종(世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장수황씨-뿌리공원내-조형물-전면
뿌리공원내 장수황씨 조형물 전면

 

그는 영의정(領議政)에만도 18년동안 재임 하면서 농사의 개량(改良)과 예법(禮法)의 개정(改定) 등 많은 치적(治積)을 쌓았다. 그의 아들 치신(致身), 수신(守身), 직신(直身), 4형제도 모두 벼슬에 등용되어 가문을 빛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오위장(五衛將) 열(悅)으 아들 정욱(廷彧)이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거쳐 광국일등공신(光國一等功臣) 등으로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 보(輔)를 관동(關東)으로 배종(陪從)하기도 했다. 문장(文章)에 능한 그는 시(詩)와 서예(書藝)에도 뛰어났으며, 지천집(芝川集)을 저술하였다. 영조(英祖)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경원(景源)은 삼례(三禮)에 정통했고, 특히 고문(古文)에 밝았으며 서예(書藝)에 뛰어나 부사(府使) 관(瓘)의 아들인 맹헌(猛獻), 여헌(汝獻), 효헌(孝獻) 3형제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장수황씨-조형물-위치
뿌리공원 장수황씨 조형물 위치도

족보 이야기

족보란 한 씨족과 본관(本貫)이 같아 동조의식을 가진 남계 친족)의 계통과 혈통관계를 기록한 책으로서 , 성보(姓譜), 씨보(氏譜), 계보(系譜), 세보(世譜), 대보(大譜), 가보(家譜)로도 읽힌다.

 

시조(始祖)를 비롯하여 역대조상의 일과 역사가 담겨 있으며,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실려 있어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 수 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따라서 혈통을 실증하는 귀중한 문헌이므로 후손으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를 알게 하여 조상을 숭배하고 가계(家系)를 계승하며 종족의 단결과 화목의 풍을 도모하는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기나긴 역사를 가진 우리의 족보는 중국 한나라 때, 우리나라는 고려 때 등장한 것으로 유래된다. 그 중 우리나라 족보는 외국에서도 부러워할 정도로 각 가문마다 문헌으로까지 엮어 2천년 가까이 기록해 온 나라는 없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가히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일컫는 이유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한반도에 족보가 처음으로 건너온 것은 1562년(명종 17년)의 문화유보(文化柳譜)라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成化譜)이다 굳이 조선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의 문벌귀족들도 족보와 유사한 혈통 증명 체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역사에서 족보는 집안의 보물로 자신의 목숨보다 중히 여겨왔으나, 근대에 들어 서양 문물(文物)의 유입과 핵가족 제도로 시대가 변천하면서 봉건사상의 유물로 도외시하는 경향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지금도 세간에서 근본이 없는 사람 으로 치부되었을 때 에는 , 그 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상들의 족보의 소중함을 이깨워준다. 따라서 족보는 피의 기록이자 혈연의 역사로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끊임없이 이어야 할 것이다.

장수황씨-돌림자-항렬표
장수황씨 돌림자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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