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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ㅎ ) 성씨(姓氏) 모음

선행(先幸) 남양(南陽) 홍씨(洪氏) 항렬표

by 하얀나비 미드저니 2023. 2. 6.

관향(貫鄕)의 연혁(沿革)

남양(南陽)은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남양읍 일대의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당성현(唐城縣)이다. 신라가 757년(경덕왕 16)에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쳤고, 822년(현덕왕 14)에 수성군(水城郡)에 병합되었으나 829년(흥덕왕 4)에 당성진을 설치하면서 분리되었다. 1172년(명종 2) 독립하여 감무를 두었다. 1290년(충렬왕 16)에 강령도호부(江寧都護府)로 승격되었고 다시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남양도호부가 되었다. 1896년에 경기도 남양군이 되었다. 1914년 수원시가 분리되면서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001년 화성시로 승격되었고 시청 소재지는 남양읍이다.

 

남양(南陽) 선행(先幸) 홍씨(洪氏) 돌림자

시조(始祖) 홍선행(洪先幸)은 당성에 대대로 살아온 선비의 집안으로 고려 때 금오위 별장동정을 지냈으며 가문의 기틀을 잡아 가세를 크게 번창 시켰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남양(南陽)으로 하였다. 남양 홍씨 토홍계는 조선시대에 상신 2명, 문형 1명, 청백리 3명, 부마 1명, 공신 3명 등을 배출하였다. 문희공파에서는 홍언필(洪彦弼)이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홍섬(洪暹) 역시 선조 때 영의정을 세 차례나 중임하고 청백리에 뽑혔다.

 

대호군공파에서는 정효공파의 정효공 홍담(洪曇)은 홍언필의 조카인데, 훈구파(勳舊派)의 거두로서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역시 청백리에 뽑혔다. 대호군공파에서는 홍숙(洪叔)이 병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 하였고,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창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홍익한(洪翼漢)은 그의 현손이다. 참의 공파의 홍가신은 청난공신으로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그 손자인 홍우정, 홍우랑, 홍우원 청학고등학교에 홍현승, 등이 판서와 청백리,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남양선행홍씨-뿌리공원내-조형물-전면
뿌리공원 남양선행 홍씨 조형물 전면

주요인물

홍경래(洪景來)

1798년(정조 22) 사마시(司馬試)에 낙방하니 조정(朝庭)에서 평안도(平安道) 출신의 배척과 안동 김씨(安東金氏)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횡포가 만연한 정세(情勢)를 한탄하고 과거(科擧)를 단념한 후 산에 들어가 독서(讀書)하며 정권쟁탈(政權爭奪)을 결심하였다. 1800년(순조 1) 박천(朴川)의 청룡사(靑龍寺)에서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반군(飯軍)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으며 마적단(馬賊團) 두목 정시수(鄭始守), 거부(巨富)인 이희저(李禧著)를 포섭한 후 다복동(多福洞)을 본거지로 삼아 난(亂)을 일으켰다. 그는 각지의 무인(武人), 술사(術士), 도사(道士)를 규합하여 한 때 평안도(平安道) 일대를 장악했으나 관군(官軍)의 반격으로 정주(定州)에서 전사하였다.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은 조선왕조(朝鮮王祖)의 대표적인 민중반항운동의 하나로 평가(評價)되고 있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토홍계(土洪系)의 시조(始祖) 홍선행(洪先幸)은 당성(唐城: 남양의 옛 지명)에 세거(世居)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금오위 별장(金吾衛別裝)을 지냈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하게 상고(祥考)할 수 없으나 후손들이 당성(唐城)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가세(家勢)가 크게 번창(繁昌)하였으므로 선행(先幸)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남양(南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온 것 으로 전(傳)한다. 남양(南陽) 홍씨(洪氏)의 토홍계(土洪系)는 조선조(朝鮮朝)에서 크게 명성을 날렸는데 익생(益生)은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목사(牧使)를 거쳐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귀연은 대호군(大護軍)을 식(湜)은 검열(檢閱)을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 정언(正言)을 지냈다. 특히 언필(彦弼)은 중종(中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뛰어났으며 아들 섬(暹)은 명종(明宗)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후 선조(宣祖) 때 영의정을 세 차례나 중임(重任)했을 뿐 아니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부자(父子)가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편 선조(宣祖) 때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난(亂)을 평정(評定) 하는데 공(功)을 세워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진 가신(可臣)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광해군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우참찬(右參贊) 담(曇)의 아들 종록(宗祿)은 1589년(선조 22) 모역(謨逆)한 정여립(鄭汝立)의 일파로 몰려 한때 유배되기도 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功)을 세워 암행어사(暗行御史)와 조도사(調度使)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그 외 추증된 진문(振文) 형제가 이름났으며 직제학(直提學) 종록(宗祿)의 아들 헌(憲)은 광해군(光海軍)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했다.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내고 남계군(南溪君)에 습봉(襲封)된 숙은 그의 아들 형제와 함께 가문을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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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선행 홍씨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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