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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 성씨(姓氏) 모음

영양남씨(英陽南氏)

by 하얀나비 미드저니 2023. 10. 28.

 

 

 

 

 

영양남씨의 조상들 발자취를 더듬는 조형물을 뿌리공원에 만들었다. 이 공원에는 다른 성씨 243기의 조형물과 함께 공원을 만들었다. 공원 둘레로는 냇물이 흐르고 공원에는 숲을 만들어 휴식공간을 만들었다.

 

 

 

영양남씨(英陽南氏)  관향(貫鄕)의 유래(由來)

 

축산리 동명의 유래는 지형(地形)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形局)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8세기 중기인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나, 영양남씨(英陽南氏) 입향시조 유래로 더 유명하다.  경덕왕(景德王) 14년(755) 당(唐)나라 현종(玄宗) 연간에 김충(金忠)이란 안렴사(安廉使)가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던 도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이곳 축산에 표착(漂着)한 다음  신라에 살기로 청원하자 경덕왕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씨(南氏)로 사성(姓)하고 시호를 영의(英毅)라 내리고 식읍(食邑)을 영양(英陽)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남씨 시조가 되었으며 뒤에 영양, 의령, 고성으로 분파되었다고 한다.

 

영양남씨족보(英陽南氏族譜)

 

조선후기 문신 남자가 1680년에 편찬하고 1712년 안동의 남흥재사에서 간행한 영양남씨의 족보.

분량은 3권 1책이며, 판종은 목판본이다. 표제와 판심제 모두 "양양남씨족보" 이다. 체제는 서문(序文), 여양남씨선대가 고문자(英陽南氏先代可考文字), 범례(凡例), 보도(譜圖), 발문(跋文), 문중완의(門中完議)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1622년(광해군 14) 남융달(南隆達)의 서문, 1680년 남자(南磁)의 서문, 1712년 안련석(安鍊石)의 서문 등 모두 3종이다. 이들 서문에 따르면, 영양남씨는 광해군연간에 남현(南俔) 등이 의령남씨족보를 간행하자 여기에 자극되어 남융달을 중심으로 족보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완료하지 못했다. 이에 그의 아들 남자가 이를 계승하여 1680년 경에는편찬을 완료하였으나 역시 간행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이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1712년에 자손과 동종들에 의해 안동에서 간행되다. 이 것이 바로 영양남씨임진보(任辰譜)로서 체제와 내용은 이미 숙종 초년에 완성되었고 간행만 숙종 후반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영양남씨-뿌리공원내-조형물-전면
영양남씨 조형물 전면


영양남씨선대가고문자는 다른 족보의 부록과 유사한 것으로 묘지명, 호적, 묘표음기 등을 수록한 것이다. 이 중 남민생(南敏生)의 안동부 호적(戶籍), 남팔개(南八凱), 남팔준(南八俊), 남의종(南懿宗)의 안동부 호적(1486), 남혁(南弈)의 외손 풍산유씨 유식(柳湜) 집안의 호적류 등은 세계 상정(詳正)의 근거자료로 제시된 것으로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외 묘지,음기는 남휘주(南暉珠) 남의원(南義元), 남유달 등의 사적(事蹟)이다. 범례는 모두 20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른 족보에 비해 매우 세분된 형태를 보이는 것은 세계 상정에 대한 조항들이 부언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족보는 가문의식 또는 동종의식의 결정체로서 영양남씨족보를 편찬한다는 일차적인 목적 외에 남씨 전반의 세계를 바로 잡으려는 세계변정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이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의령남씨족보의 상대(上代) 세계였다.

 

범례에 따르면, 남선(南銑 : 1582 ~ 1654) 등이 의령남씨족보를 편찬하면서 시조 남민의 8세손 홍보(洪甫),군보(君甫), 광보(匡甫) 3형제 대에서 각기 영양남씨, 의령남씨, 고성남씨로 분관되었다고 기술하였다고 한다. 실제 1693년(숙종 19) 남익훈(南益薰)이 간행한 의령남씨족보에도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남자(南磁) 등은 군보의 분봉(分封) 사실과 의령남씨 초조설(初祖說)을 부정하는 한편 각종 자료를 토대로 독자적인 상대 세계를 제시하였다. 전술한 대로 상당수의 호적 자료를 제시하고 범례의 대부분이 세계 변정에 대한 항목으로 설정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참고로 의령남씨족보가 시조 이래로 별다른 실전없이 세계가 구성된 반면 이 족보에서는 시조에서 손자 익(翼)까지 3대는 세계가 분명하지만 문제가 된 홍보,군보,군용(君用)는 익(翼)의 후손으로 표기되어 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홍보의 주기(註記)에서는 "홍보가 영양을 본관으로 하였다."는 의령남씨측의 주장을 오류로 규정하였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족보에서는 영양남씨 역시 군보의 후손으로 되어 있어 의령남씨족보와 상충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영양남씨와 의령남씨 모두 군보의 자손이라는데 문제의 주안점이 있다. 따라서 이 족보는 17세기 후반 남씨 전반의 세계(世系) 인식과관련된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이 시기에 간행된 의령남씨족보와 상호 대비해 볼 필요성이 많다.

 

형태적으로 보도는 8층 휭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가 매겨져 있다. 권1에는 군보로부터 14세손까지 수록되어 있는데, 군보의 5세손 휘주(暉珠)의 장자 민생(敏生)-부량(富良),수량(遂良),황재(黃載),배남(裵楠),의량(義良),우량(佑良),보량(普良)계열, 차자 약생(藥生)-이담(李憺) 계열, 장녀와 혼인한 사위 안원(安援)안종약(安從約) 계열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발문은 1681년(숙종 7) 남씨의 외손인 이유장(李惟樟)이 지은 것이며, 문완의는 1712년 족보 간행 당시 남천호 등 20인이 선대 묘전(墓田)의 관리를 협약한 내용으로 이를 명문화시키려는 취지에서 족보의 말미에 첨부한 것이다. 이 족보는 안동의 영양남씨들이 간행한 초간본 족보로서 남씨 전반의 세계(世系)에 대한 의문과 논변이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영덕 처인당은 영양남씨 참봉공 남필대(南必大 ; 1608 ~ 1666)가 중수한 이후 남달만(南達萬 : 1713 ~ 1784)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지속적인 크고 작은 보수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과거 이 건물은 종가에 딸린 건축물인데 기존의 종가 건축물의 유구를 찾아 볼 수 없는 점은 아쉬운 점 이다. 다만 종가의 옛 모습은 한국전쟁 이후 건립한 안채와 사당을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처인당은 영덕 인량리에 약 600여년 간 세거해 온 영양남씨의 대표적인 건물로
 문중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으며, 인량리의 영양남씨는 17세기 이후 영남학파의 일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 문중이고, 처인당은 그 중심 건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성이 있다.

 

 

영남남씨 남휘주


고려말 전리판서를 지낸 남휘주(南暉珠 : 1326 ~1372)와 공조참판 남민생(南敏生, 1348 ~ 1407)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받들기 위해 마련된 건물이다. 창건 시기는  정화기 알 수 없으나 법당인 남흥사를 개조하여 지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청벽 이수연(靑壁 李守淵, 1693 ~1748)이 1744년 기록한 「남흥재사중수기(南興齋舍重修記)」로 미뤄보아 18세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 으로 추정된다. 「안동 영양남씨 남흥재사 」는 경북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ㅁ자형 배치를 한 재실건축물로 오른쪽에 누(樓)를 구성하고, 누의 전면이 서쪽을 향하여 정침과 이어져 있으며,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이 연결되어 하나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임, 그리고 누에 사용된 대들보, 보아지, 공포 등 다수의 부재와 영싸창(창호 가운데 기둥이 있는 창), 정침(正寝) 대청기둥의 모접기 등에서 고식의 전통기법이 잘 나타나 있어 중수시기인 1744년과 그맥을 같이 한다.

조선 때 문신인 남창년

조선 때 문신인 남창년(1463 ~)의 무덤 근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기와에 남아 있는 명문으로 보아 조선 순조 26년(1826)에 지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스승인 졍여창 선생이 무오사화(1498) 때 화를 당하자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그 뒤 문학으로 추천 받아 부령교수가 되었고 저서로 <성도설> 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마골이라 불리는 곳에 있으며 담장이 없는 ㅁ자형 남향 건물이다. 둔재(屯齋)란 현판이 걸려 있고, 대청 위로 보이는 천장 구조와 뒷 벽에 있는 창문에 옛 전통 기법이 잘 나타나 있다.

호지마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영양남씨 괴시파의 종가이다. 17세기 말 남붕익이 처음 지었다고 전하며,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당은 약 80년 전에 지은 것 이다. ㅁ자형의  안채 오른쪽에 사랑채가 돌출해 있는 형태로, 앞면 8칸, 옆면 5칸반 규모이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과 부엌, 오른쪽에 상방과 부엌이 있다. 상방은 원래 반칸의 마루이던 것을 방으로 개조한 것 이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정침 오른쪽 멀리 떨어진 곳에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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