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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 성씨(姓氏) 모음

청도김씨(淸道金氏) 족보

by 하얀나비 미드저니 2023. 10. 25.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조형물이 대전 뿌리공원에 설치되어있습니다. 이 공원에는 청도김씨 외에 243기의 다른 성씨 조형물이 세워져있는데 다른 성씨들과 구역별로 나누어져 설치하면서 조경공사를 하였습니다. 청도김씨의 조형물 위치는 233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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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김씨-뿌리공원내-조형물
뿌리공원에-조성된-청도김씨-조형물

 

청도김씨 관향의 연혁

청도(淸道)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쪽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 이서소국(伊西小國)의 땅이었으나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 제3대왕, 재위기간 : 24~57)때 신라에 병합되었다가 구도성(仇刀城)의 경내(境內) 솔이산(率伊山), 오도산(烏刀山),경산(驚山)의 3성(城)을 합하여 대성군(大城郡)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때 와서 구도(仇刀)를 오악현(烏岳縣)으로, 경산(驚山)을 형산현(荊山縣)으로, 솔이산(率伊山)을 소산현(蘇山縣)으로 고쳐 밀성군(密城郡)의 영현(嶺縣)으로 삼았다가 고려초(高麗初)에 3성(城)을 합하여 청도군(淸道郡)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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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김씨 족보 가문의 유래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始祖) 김지대(金之岱)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중(高宗)과 원종대(元宗代)의 명신(名臣)으로 1217년(고종4) 변방에 거란(渠丹)이 침입하자 충효쌍수(忠孝雙修)라는 시(詩)를 남기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쟁에 나가 큰 공(功)을 세웠습니다.

이듬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주사록(全州司錄)을 거쳐 보문각교감(寶文閣校堪)에 제수되었으며 전라도 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비서소감(秘書少監), 지공거(知貢擧),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승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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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김씨-조형물의-전면-글
뿌리공원내-청도김씨-조형물의-글


1285년(고종 45) 북변에 침입한 몽고군(夢古軍)을 격퇴하고 민심을 잘 다스려 서북(西北)40여 성(城)을 안정(安定)시킨 공훈으로 오산(鰲山 : 청도이 옛 이름) 군(郡)에 봉해졌다. 원종(元宗)이 즉위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部)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도(淸道)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그 곳에 살면서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명문(名門)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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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지대(之岱)의 아들 선장(善壯)이 1340년(충해왕 복위 1) 조적(曺적)의 난(難)으로 왕(王)이 원(元)나라에 불려갈 때 호종(扈從)하여 일등공신(一 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증손(曾孫) 한귀(漢貴)는 공민왕(恭愍王) 때 동경도병마사(東京道兵馬使)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한 공으로 최영(崔瑩)과 함께 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한귀(漢貴)는 아우 한룡(漢龍)은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恭愍王)을 호종(扈從)하고 흥룡사(興龍寺)로 갔다가 중신(重臣) 김용(金鎔)이 난을 일으켜 환관(宦官) 안도치(安都峙)와 우정승(右政承) 홍언박(洪彦博) 등을 살해할 때 함께 순절한 절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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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김씨-조형물설치-하단의-설명문
청도김씨-조형물-건립-설명글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세종(世宗)때 형조(刑曹)와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한 점(漸 : 한귀의 손자)과 세조(世祖) 때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능주(綾州)의 천태산(天台山)에 은거(隱居)한 차산(次山 : 관찰하 호우의 5세손)이 유명했으며,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난상(鸞祥)은 을사사화(乙巳士禍)로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선조(宣祖) 때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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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상의 형 봉상(鳳祥 : 참봉을 역임)과 아우 귀상(龜祥)은 어릴 때 부터 평생을 한 집에 살며 같은 밥상에 밥을 먹고, 옷을 해 입어도 함께 해 입어 후일 선비들간에 우애를 논할 때 <봉 , 난 , 귀>란 용어가 생기기까지 하였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임란공신에 책록된 몽룡(夢龍)과 희방(希邦)이 이름났고, 순조(純祖) 때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유명한 응하(應夏)는 문하(門下)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습니다.

한말(韓末)에 와서 청도김씨(淸道金氏)를 빛낸 인물(人物)인 고산자(古山子) 정호(正浩)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학문(學問)에 진력하여 정밀한 지도(地圖) 작성에 뜻을 두고 36년간 전국을 돌며 <직재집(直齋集)>과 <반구록(反求錄)> <상제의집록(喪祭儀輯錄)> 등의 저서를 남겼고, 성민(成敏)은 부모(父母)의 병환에 손가락을 끊어 피로 탕약을 대신하여 회생시켜서 효심(孝心)을 기린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태인(泰麟), 태현(台鉉), 외득(外得) 등은 일제에 항거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투쟁에 앞장서서 명문(名門) 청도김씨(淸道金氏)를 더욱 빛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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