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김씨 조형물이 뿌리공원내에 만들어저 있습니다. 다른 성씨 244기의 조형물과 함께 공원화 시켜, 냇물과 숲이 만들어졌습니다. 숲속의 휴식처를 만들어 놓아 조상들의 얼을 기리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모여 족보박물관도 관람을 하도록되어 있습니다.
관향(貫鄕)의 연혁(沿革)
언양(彦陽)은 경상남도 동북부(東北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新羅) 때의 거화현(居火縣)인데 경덕왕(景王 : 제 35대왕, 재위기간 : 742~765)이 헌양(獻陽)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때 와서 언양(彦陽)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습니다.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언양김씨신유보(彦陽金氏辛酉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시조 김선(金鐥)이 고려(高麗) 때 언양군(彦陽君)에 봉군도었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언양(彦陽)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始祖) 선(鐥0의 손자 정보(精鐠)가 고려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고, 증손(曾孫) 경숙(鏡淑)은 대장군(大將軍 : 정3품 무관직 벼슬)을 역임하여 신호위별장(神號衛別將) 수(壽 : 경숙의 아들)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수(壽)의 아들 언련(彦連)은 신호위중랑장(神號衛中郞將)을 지냈습니다.
언양김씨(彦陽金氏)가 자랑하는 취려(就礪)는 음보(蔭補 : 조상의 덕으로 벼슬에 오름)로 정위(正尉)에 임명되어 동궁위(東宮衛)를 거쳐 장군(將軍)으로서 동북계(東北界)를 진압한 후,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1216년(고려 고종 3)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1219년(고종 6) 국경 경비병 출신인 부장(副將) 다지(多知)의 반란을 평정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 판호부사
(判戶部事)에 올랐어요. 이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태사(太子太師)로 특진한 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으며, 평소 강직 하고 청백한 성품으로 군기를 엄정히 하고 부하를 아꼈으며, 전장에서는 기발한 계교로써 많은 공(功)을 세웠습니다.
취려(就礪)의 아들 전(佺)도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상장군(上將軍), 판리부사(判吏部事)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양감(良鑑 : 상장군으로 언양군에 봉군)과 변(賆 : 첨의 평리를 역임)
이 유명하다. 양감(良監)의 셋째 아들 문연(文衍)은 첨의중호(僉議中護)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고, 변(腁)의 아들 윤(倫)은 충목왕(忠穆王 : 제 29대왕, 재위기간 :
1344~1348)초에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러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경직(敬直)이 문하시중(門下侍中), 검교첨의찬성사(檢校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언양백(彦陽伯)에 봉군되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선천군수(宣川郡守)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진 숙보(叔甫)의 아들 관(瓘)이 1415년(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병조정랑
(兵曺正郞)을 지내고, 세조(世祖) 때는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적개이등공신(敵慨二等功臣)으로 종부시정(宗簿侍正 : 왕실의 보첩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 3품 벼슬)이
되었으며, 강원도(江原道)와 황해도(黃海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뒤 예종(睿宗) 초에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언침(彦琛)의 아들 천일(千鎰)은 임실 현감(任實縣監)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나주(羅州)에서 고경명(高敬命), 박광옥(朴光玉),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조정(朝廷)으로 부터 판결사(判決事)의 벼슬과 창의사(倡義使)의 호(號)를 받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왜군(倭軍)과의 전투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진주성(晋州城) 을 사수(死守)하다가 적에게 성(城)을 함락당하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자결하여 뒤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어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 밖의 인물로는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어 광필(匡弼)의 아들 준(浚)이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교동현감(喬棟縣監)을 지냈으나,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죽산 부사를 지내고 안주목사(安州牧使) 겸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안주성(安州城)이 함락되자 처자와 함께 자결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중만(重萬)은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를 역임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석중(石重)과 취련(取鍊), 군자감정(軍資監正) 도손(道遜), 중추부사(中樞府使) 덕순(德純), 창우(昌宇), 희채(禧采), 이조참판(吏曺參判) 순봉(舜鳳), 공조참의(工曹參議) 사호(士豪)와 두열(斗烈)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습니다.
'( ㄱ ) 성씨(姓氏)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주김씨(廣州金氏) (1) | 2023.10.27 |
---|---|
청도김씨(淸道金氏) 족보 (1) | 2023.10.25 |
안동권씨(安東權氏) 돌림자 (1) | 2023.02.06 |
상산김씨(商山金氏) 족보 돌림자 (1) | 2023.02.05 |
소주 가씨(蘇州賈氏)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항렬표 (2) | 2023.02.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