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族譜)는 성씨(姓氏)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없는 자료의 하나로 시조(始祖) 부터 역대 조상의 일과 우리나라 역사가 담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이 족보에 실려있어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수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현풍곽씨(玄風郭氏) 시조 항렬
이에 따라 옛날부터 족보는 집안의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대할때는 상위에 모셔놓고 정한수를 떠서 절을 두번한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조상을 대하듯 하였으며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소중하게 여겨온 족보가 해방후의 서양화와 지금의 핵 가족 제도가 되면서 봉건 사상의 유물로만 생각하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서 또 지금도 " 근본이 없는 사람 " 으로 치부되었을 때 그 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조상들이 족보를 왜 그렇게 소중히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족보는 " 피의 기록이며 혈연의 역사이다. "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가며서 지켜온 족보를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이어야 할 것 이다.
관향(貫鄕)의 연혁(沿革)
현풍(玄風)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추량화현(推良火縣) 또는 삼량화현(三良火縣)이라 하다가 경덕왕(景德王 35대)이 현효현(玄驍縣)으로 고쳐서 화왕군(火王郡 : 창녕군)에 속하게 하였고 고려초(高麗初)에 현풍현(玄風縣)으로 개칭(改稱)하여 밀양(密陽)에 이속 시켰으나 조선조(朝鮮朝)에서 한때 포산(苞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송나라 귀화성씨(歸化姓氏)로 알려진 현풍곽씨(玄風郭氏)는 중국(中國) 관서(關西) 홍농(弘農) 출신인 곽경(郭鏡)이 고려(高麗) 인종(仁宗 17) 때........
우리 나라에 들어와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 오늘날 국무총리)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으므로 처음엔 관향(貫鄕)을 포산(苞山)으로 하였으나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포산현(咆山縣)이 현풍(玄風)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현풍(玄風)을 본관(本貫)으로 하게 되었다.
일찍이 영남내륙(嶺南內陸)에 뿌리를 내린 현풍곽씨(玄風郭氏)는 고려중기(高麗中期)에서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충(忠), 효(孝), 열(烈)의 가통(家統)을 이어 우리나라의 대표적(代表的)인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알려졌다.
현풍곽씨(玄風郭氏)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서 시조(始祖) 포산군(苞山君)의 현손(玄孫) 기정(基正)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 ; 고려시대 상서육부(尙書六部) 가운데 하나, 문관(文官)의 인사와 훈장 등의 사무를 관장하던 중앙관청)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응(膺)은 충렬왕조(忠烈王朝)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정2품 정승직 판사 )와 감찰어사(監察御事 : 고려시대 종 6품 관직 검사)를 지냄으로써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 성종이 자신을 잘 보필혀 내린 칭호,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등 11인을 첫 책봉하였다.) 녹훈된 부(郛)는 수사도(守司徒 : 오늘날 군수급)에 올라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고 제학(提學) 원진(元振)의 9세손(世孫) 안방(安邦)은 세종(世宗) 때..........
해미현감(海美縣監 : 오늘날 도지사급)과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지내면서 청렴한 성품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 관리로 뽑힘)되었으며 그의 아들 승화(承華)는 어려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한훤당 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당대의 양재(兩才)로 불리웠다.
현풍곽씨(玄風郭氏)는 특히 안방(安邦)의 현손대(玄孫代)에서 주(走)자 항렬의 8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현곽8주(玄郭八走〉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중 월(越), 율, 준 3형제가 빼어났다.
1556년(명종 1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한 월(越)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人物)로 선조조(先祖祖)에서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내며 시폐(時弊)를 노하는 상소를 올렸고 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쳐 청송(靑松), 남원(南原)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한편 율은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조식(曺植)과 정구(鄭逑))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학행(學行)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홍산현감(鴻山縣監)과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초계군수(草溪郡守)로 있으면서 왜군(倭軍) 방어를 잘하여 예빈사부정(禮賓寺副正 : 외교사절을 위한 연회와 고관들의 음식물 공급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특진되었으나 군내(郡內)의 유생(儒生)들이 유임시켜 달라는 상소로 초계군수(草溪郡守)에 재임되어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 팔도고을이 초계만 같다면야........"하고 개탄했을 만큼 선정(善政)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김면(金沔)이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그 막하에 들어가 공(功)을 세웠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안음현감(安蔭縣監)으로 김해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과 함께 호남(湖南)의 목구멍이라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부저항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 이상(履常), 이후(履厚)도 그 아버지를 안고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했고, 딸 이문호(李文虎)의 아내도 남편이 포로가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내 〈일문상강(一門三綱〉의 가문으로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표창하였다.
목사(牧使) 월(越)의 세째 아들 재우(再祐)는 현풍곽씨(玄風郭氏)가 자랑하는 인물(人物)로 1552년(명종 8) 의령현(宜寧縣) 세천리(世千里) 외가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했으며, 일찍이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익혔는데 조식이 자기 외손녀를 재우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재우는 왕으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되고 나이 40이 넘자 벼슬을 단념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아버지 월(越)의 무덤을 찾아가 "아버지께서 만약 계셨다면 왜놈들의 창궐이 어찌 걱정되겠습니까? " 하고 울며 하직한 후 임진년 4월 27일에 의병(義 兵)을 일으켜 항상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첩리(帖裡)를 입고 스스로 〈천강홍의대장군〉이라 칭하면서 의령(宜寧), 삼가(三嘉), 합천(陜川), 현풍(玄風), 창녕(昌寧), 영산(靈山) 등지에서 크게무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경상좌도방어사(慶尙佐道防禦使)로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고 관찰사 김수(金晬)와의 불화로 대관(臺官) 홍여순(洪汝淳)의 탄핵을 받아 영암(靈岩)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1613년(광해군 5) 광해군(光海君)_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 하자 신구(伸求)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혼탁한 조야(朝野)의 기강이 문란함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 비슬산(琵瑟山 : 경상북도 달성군과 청도군 사이에 있는 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솔잎을 씹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 밖에 재우(再祐)의 종형(從兄)인 재겸(在謙)은 임진왜란 때 금강(琴江) 방어에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에는 재우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의병(義兵)을 거느리고 싸워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으며 자방(自防)은 의병장(義兵將) 조헌(趙憲)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錦山)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현풍곽씨의 맥(脈)을 이었다.
고종(高宗) 때의 거유(巨儒) 종석(種錫)은 퇴계 이황(李滉)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이진상(李震相)에게 성리학(性理學)을 이어받아 이기설(理氣設)을 주장한 학자로 한일합방이 되자 고향에 은거하다가 3,1운동 때는 전국 유림(儒林)들의 궐기를 호소했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장서(長書)를 지어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여 충의(忠義)의 가문(家門)인 현풍곽씨(玄風郭氏)를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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